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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 내용들은 태평양 전쟁 발발이후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 대한 현황에 대한 이야기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65년저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식민 시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일본인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반성해야 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저자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또한 이런 어려운 정세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조선인은 일본법률에 복종하거나 죽거나 둘중 하나다." 한일병탄이후 조선에 처음으로 부임했던 데라우치가 말했듯, 조선민중들은 일본법률 치하에서 개처럼 살아야만 했다, 헌병,경찰관에게 살상을 허용하는 87조항에 이르는 즉결권 과 강제집행권 은 조선인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수 있는 절대권한이었다. 익지 않은 감을 팔았다고 구타당하고, 벌금을 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이 휘두르는 일본도에 팔다리가 잘리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는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길 한복판에 팔다리가 묶인채 톱으로 죽음을 당한 채 방치되던 것이 조선에서의 일상의 모습이었다. 일제강점기하에서의 지속적인 토지침탈로 수많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잃고 만주와 일본등지로 떠나야만 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농사지을 땅을 잃은 농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 떠나야만 했던 거라면, 태평양 전쟁이후 전쟁이 길어지고 전선이 확대되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전쟁터로 징용되었고, 그들이 비운 노동의 공백을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들로 채우게 된다. 조선인이 일본인 노동자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음식을 배당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노동자의 처우를 끌어내리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 상급자들은 "저들 좀 봐, 저래도 참잖아."라고 했다. 듣던 대로 직장에서 아주 고된 일은 모두 조선인들 차지였다. 조선인 중에는 배가 고파 잘 움직이지 못한 나머지 탄차 사이에 끼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상급자는 "멍청하게 굴면 이렇게 된다."라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언제나 민족적 차별을 받았고, 더 나쁜 노동 조건에서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조선인은 정말 싸구려였다. 그런데 조선인들을 이렇게 취급하고는 또 일본 노동자들에게는 "조선인들은 저런 조건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느냐."하는 식으로 압력을 넣었다(일본 탄광노동조합운동사편찬위원회,18쪽,1958년)(p.84) 조선인들은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과 일급 3엔등을 약속받고 일본과 동남아, 중국등지로 끌려가 탄광지대 및 비행장 건설등에 동원되어일본인들이 기피하는 가혹한 작업장등에 배치되었지만, 약속과는 다른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과 절반도 안되는 임금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지만, 도망치다가 붙잡히 사람들은 반죽음 상태가 될때까지 구타당하고 벌거벗겨진 채 사람들 앞에 보였주었다고 한다. 또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 생오이등으로 식사를 대신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참혹함이 이루 말할수 없을 것 같다. 반도인은 일본어 해독자가 적어 작업상 불편하고, 작업의 숙달이 늦고,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적고, 솜씨가 없고, 기술에 대한 향상심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고, 사실 이상으로 본토인과 차별감을 느낀다.(조선인 징용 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 회의 자료) 일본인 대다수가 조선인에 대해 이런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때 조선인들에 멸시감은 더더욱 컸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지속적인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해방된 사실을 알 경우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두려움때문에 그들이 자고 있는 틈을 타서 경찰등을 동원하여 몰래 살해하여 시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한일협정 이후 40년이 지났고 결과적으로 박정희정권은 무상3억달러, 유상2억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라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경제개발에 쓰면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화려함 뒤에는전두환정권과 김영삼 정권까지 계속 이어지게되는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 있었다. 패전이후 일본곳곳에서 조선인 징용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때문에 당시 징용된 조선인의 수나 피해보상액등을 측정하기도 어렵거니와 당시 징용되었던 사람들도 대다수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당시의 생존자는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아직도 일본정권을 상대로 피해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일본정부는 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을 내세우면 한국정부에게 손해보상을 청구하라며 모든 소송을 기각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은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는 1965년 출간된 책으로 저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식민 시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일본인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반성해야 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재일사학자 박경식은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또한 이런 어려운 정세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당시 일본 미래사未來社에서 출간한 은 아직 식민 시대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때,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학살현장을 찾아다니고, 각종 문서와 조선인 징용자, 목격자를 인터뷰하여 정리한 것으로 광산채굴과 산림벌목, 각종 빌딩 건설 및 군수산업에 혹사당한 조선인들이 식민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떻게 강제연행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해방 후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서문ㆍ

서장 _ 제국주의와 민족 문제

1장 _ 조국을 일본에 빼앗기다~
고향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도항
재일조선인의 생활 상태
재일조선인에 대한 박해

2장 _ 강제연행~
강제연행 정책
강제연행 상황과 노무관리
강제적인 훈련 상황
도망자 속출과 탄압 정책
사상(死傷) 상황과 유골 문제ㆍ
무책임한 일본 정부
결론

3장 _ 체험자의 이야기
속아서 홋카이도의 노동자 합숙소로 가다
인간사냥꾼에게 잡혀 히타치 광산으로 연행되다
수갑에 채워져 규슈의 도요스 광산으로
행선지도 모른 채 비행장 건설공사장으로
‘관 알선’으로 니혼고칸(日本鋼管)에ㆍ
군속으로 남방 설영대로 연행되다
군속으로 징용되어 한 쪽 다리를 잃다

4장 _ 아직도 남아 있는 할퀴고 간 자국
심한 학대로 자살자까지 나온 히타치 광산ㆍ도키와 탄광
굶주림과 혹한 속에서 자행된 학살 (후쿠시마, 미야기)
빌딩 건설과 군수산업에 혹사당하다 (도쿄, 가나가와)
지하공장 건설에 동원되어 생사불명 (도치기, 군마)
군인ㆍ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되고 추방당하다
가장 학대 받고 가장 사망률이 높던 홋카이도 탄광
가장 많은 조선인이 연행되고, 유골이 산재해 있는 규슈 탄광
현재도 시체로 가득 찬 하나오카 광산 및 이와테 학살 사건
시나노가와 발전소 학살 사건과 시체로 해저를 메운 우베 탄광

5장 _ 자료
시나노가와 수력발전소 학살사건ㆍ
간토대지진 당시의 학살 견문기
이와테현 오후나토 공사장 학살사건ㆍ
조선인 징용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
조선에 대한 일제의 죄악행위에 대하여
재일조선인에 관한 문헌 목록

6장 _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후기